에버튼 FC
1. 개요
에버튼 FC는 1878년에 창단된 잉글랜드 리버풀 시를 연고로 하는 프리미어 리그의 축구 클럽이다. 에버튼은 2020-2021 시즌 기준으로, '''잉글랜드의 최상위 축구 리그에 가장 많이 참여하고 있는 팀'''이다[5] . 물론 프리미어 리그 시대에 들어서도 단 한 번도 강등된 적이 없이 개근 중이다.
1878년 창단된 에버튼은 1888년에 설립된 잉글랜드 프로 축구 리그 조직인 "더 풋볼 리그 (The Football League)"의 창설 멤버이며 1890-91시즌 클럽 역사상 첫 리그 우승을 차지한 에버튼은 이후 9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에버튼의 최고 전성기는 1980년대 중반으로 구단은 리그 우승 2회, 커뮤니티 실드 우승 4회, FA컵과 UEFA 컵 위너스컵[6] 을 각각 1차례씩 우승하는 황금기를 누렸다. 그러나 에버튼의 가장 최근 우승은 1995년 FA컵 우승... 즉 20년이 넘도록 우승이 없다.
에버튼의 애칭은 "Toffees" "The Blues" "The School of Science" "The People's club" 등이 있으며, 구단의 전통적인 컬러는 파란색과 흰색.
에버튼은 같은 도시에 연고지를 두고 있는 리버풀 FC와 전통적인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두 팀간의 대결을 '''머지사이드 더비'''라고 부른다.
사우스햄튼 FC와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의 유스에 비해 거상의 이미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박 또는 알짜 선수들도 잘 키워낸다.
2. 특징
라리가의 레알 마드리드 CF, FC 바르셀로나, 아틀레틱 빌바오, 세리에 A의 인테르 같은 1부 리그 개근 팀이 없는 잉글랜드 리그에서, 현재 '''1부 리그에서 117번째 시즌'''을 보내고 있으며, 강등 없이 67번째 시즌을 보내고 있는, '''1부 리그에 가장 오랜 시간 머무르고 있는 팀'''이다.[7] 통산 9회의 1부 리그 우승 경력은 잉글랜드 전체 클럽 중 4번째로 많으며 FA컵도 5회 우승을 기록, 명문 클럽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엠블럼에 있는 'Nil satis nisi optimum'은 라틴어로 '최고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의미다.
3. 역사
1878년 세인트 도밍고스 풋볼 클럽(St. Domingo's Football Club) 이라는 이름으로 창단되었고 1879년에 에버튼 FC로 이름을 바꾸었다. 본래는 홈 구장으로 앤필드를 사용했으나 존 훌딩이 앤필드의 주인이 되면서 임대료를 올려버리자 구디슨 파크로 구장을 옮겼다. 에버튼이 구장을 옮긴 바람에 생긴 구단이 바로 리버풀 FC이다. 덕분에 리버풀과는 전통적으로 라이벌 관계이며 두 팀의 경기는 '''머지사이드 더비'''라고 불린다.
가난한 노동자들의 스포츠 정도로 귀족들이나 기득권들에게 무시당하던 프로 축구를 제대로 인식하게 한 구단이기도 하다. 1916년 구디슨 파크에 영국 왕세자 일행이 처음으로 보러 와서 인식을 다르게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리그와 FA컵을 각각 1개씩 따기도 했다.
팀 역사상 첫 전환기는 1925년에 트란미어 로버스에서 딕시 딘을 사면서부터였다. 1927/28 시즌 중반까지 최고 기록은 59골이었고 그가 57골을 기록했을 때는 단 한 경기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기록을 깨려면 해트트릭을 기록해야 했는데 하필이면 상대가 아스날이라 모든 사람들이 최다 골 기록을 깨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그는 해트트릭을 기록해 리그 최고 기록인 60골을 기록했으며, 그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1929/30 시즌 때 22팀 중 꼴찌로 강등됐지만 그는 팀에 꿋꿋이 남아 폭발적인 득점력으로 1시즌만에 선두로 1부 리그에 재승격시켰고, 1931/32 시즌에 리그 우승까지 차지하는 경이로운 활약을 보였다.
1937년에 딘이 팀을 떠난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재정난, 주축 선수들의 이탈로 부침을 겪다가 1961년에 팀의 센터포워드 출신인 해리 캐터릭이 감독으로 취임하여 전원 수비, 전원 공격을 앞세운 '토탈 풋볼'을 적용시켜 로이 버논과 알렉스 영, 조 로일 등의 활약으로 1962/63 및 1969/70 시즌에 각각 리그 우승을 했고, 1965/66 시즌에는 FA컵에서 우승을 했다.
1970년대 내내 꾸준히 리그 중상위권을 유지해왔으나, 라이벌 리버풀 FC의 패권 장악으로 만족할만한 성적을 못 냈다. 1980/81 시즌 도중에 '캐터릭의 아이들' 시절 멤버이던 하워드 켄달이 감독으로 취임하여 1985년에 리그 우승과 UEFA 컵 위너스컵에 우승시킴으로써 또 전성기를 누릴 찰나, 헤이젤 참사로 인해 잉글랜드 리그가 유럽대회에 출전금지를 당해 에버튼의 3번째 유로피언 컵 출전은 그렇게 물건너가고 말았다. 1986/87 시즌 우승 뒤 잦은 감독 교체와 재정난, 트레이드 실패 등이 겹치면서 이렇다 할 활약상을 보여주지 못했다. 1995년에 FA컵 우승과 커뮤니티 실드 우승을 이루어냈으나 그때뿐이었고, 하락세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이어져 매년 강등권을 가까스로 빠져나오는 '대탈출'이 이어진 데다 머지사이드 더비에서도 매번 리버풀에 밀려 팀 사정이 암울했다. 1993/94 시즌과 1997/98 시즌에는 최종전 직전까지 강등권에 위치해있다가 최종전에서야 간신히 강등을 모면하기도 했다.
특히 1994년에 팀을 산 피터 존슨 회장이 1998년 11월에 에버튼 타투를 새길 정도로 팀을 사랑하던 팀의 간판 공격수 던컨 퍼거슨을 감독 몰래 뉴캐슬로 이적시키면서 팬들이 존슨 회장을 쫓아냈고, 공연 프로듀서 빌 켄라이트가 팀을 산 후 전임 회장 필립 카터를 회장직에 다시 불렀다. 같은 시기에 스코틀랜드 레인저스의 명장이던 월터 스미스 감독이 팀을 지휘했음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2001/02 시즌 막판에 프레스턴 노스 엔드 감독이었던 데이비드 모예스를 영입하였는데, 이 영입이 구단의 역사를 바꾸게 된다. 부임 초기부터 15위로 리그 잔류에 성공시킨 뒤 2002/03 시즌에 신동 웨인 루니의 활약으로 7위를 찍었으나, 블랙번 로버스보다 승수가 많은데도 UEFA컵에 출전하지 못했다. 모예스 감독은 적은 돈으로 가격 대비 성능비가 뛰어난 선수들을 영입하고 유소년 선수들을 대폭 기용하면서 팀의 전력을 차차 상승시켰다.
그러나 2003/04 시즌에선 한 시즌만에 강등을 걱정할 정도까지 가면서 17위로 순위가 급격히 추락했고, 설상가상으로 2004/05 시즌을 앞두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유로 2004에서 4골을 터뜨려 득점 2위에 오른 신성 웨인 루니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팔면서 전문가들 사이에 강등 유력 후보로 거론됐으나, 잉글랜드 정통 축구의 맥을 고수하며 리그에서 폭풍을 일으켜 4위를 찍어 챔피언스 리그까지 갔다. 다만 2005/06 시즌 챔스에선 본선 32강도 못가고 3차 예선에서 비야레알에게 2패로 허무하게 탈락했다.[8] 게다가 UEFA컵 1라운드에서도 디나모 부쿠레슈티에 원정에서 5:1 대패를 당하면서 여기서도 광탈당했다. 리그에선 초반 엄청난 부진에 빠지며 8경기 1골 1승7패로 꼴찌까지 떨어졌으나 첼시와의 홈경기에서 첼시의 개막 10연승을 저지한 뒤 다행히 반등에 성공하여 11위로 마감했다. 이후 2007-08 시즌 칼링 컵 4강, 2008-09 시즌 FA 컵 준우승 등 가시적인 성과가 계속 나오고 있으며 리그에서는 꾸준하게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2013-14 시즌부터 로베르토 마르티네즈 감독이 부임하여 새로운 첫 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최다 리그 승점과 함께 5위를 기록하여 미래가 밝아보였으나, 2014-15 시즌에는 11위로 순위가 곤두박질쳤다. 그 다음 시즌인 2015-16 시즌에도 상위 10위권 진입에 실패하면서 시즌 최종전을 앞두고 경질되었으며 로날드 쿠만 감독이 2016-17 시즌부터 지휘봉을 넘겼다. 부임 첫 시즌에 루카쿠의 맹활약을 비롯해 좋은 경기를 몇 차례 선보이며[9] 팀을 7위로 올려놓으며 유럽대항전 진출 티켓까지 확보해 2시즌간 망가졌던 에버튼의 명성을 되찾는 듯했으나...
2017-18 시즌 엄청난 돈을 써가며 선수를 가열차게 영입했음에도 어이없는 경기력으로 리그와 유로파를 가리지 않고 털려대며 초반에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말았다. 로날드 쿠만 감독은 여러 변명을 둘러댔지만 팀의 경기력은 몇 주째 형편없는 날들의 연속이었고 결국 파하드 모시리 구단주와 빌 켄라이트가 직접 구디슨 파크를 찾은 9R 홈경기 아스날전에서 2-5로 다시 한번 패배했다.[10] 아스날전을 치른 뒤 24시간 만인 2017년 10월 23일부로 로날드 쿠만은 전격 경질되었다.
일단 대체 감독으로 U-23 팀의 감독인 데이비드 언스워스가 몇 경기 대행을 맡은 뒤 2017년 11월 30일 프리미어리그 대표 공무원 중 하나인 샘 앨러다이스가 새로운 사령탑 자리에 올랐다. 1년 반 계약기간으로 단기소방수 롤로 온 것으로 보이는데 그 당시 중하위권을 맴돌던 에버튼의 순위를 어느 정도는 끌어올리면서 그의 역할을 수행하기는 한 것 같았지만 핵심 윙어 아론 레넌을 당시 7위 경쟁팀인 번리 FC에 팔아넘기는 기행을 저지르는 것은 물론이고 팀 훈련에도 일주일에 3~4번 이상은 지각 또는 결근하기 일쑤였다. 사실 순위는 8위로 마감했지만 실질적으로 전적은 쿠만 경질 시즌 때와 별 차이는 없었고 최종전적도 13승 10무 15패로 패가 더 많았다. '''정확하게는 에버튼보다 아랫순위의 팀들이 꽤 부진하면서 어부지리로 8위로 올라간 셈.''' 게다가 유스기용엔 소홀하고 노장들 위주로 선수기용을 해서 에버튼의 미래를 설계하기에도 어려웠다. 이러했던 내부 사정들로 인해 시즌 폐막과 함께 경질되었다.
2년만의 리빌딩에 돌입한 에버튼은 빠른 시일내에 마르코 실바라는 젊고 유망한 감독을 새로운 사령탑에 앉혔다. 이 때문에 마르코 실바의 전 소속팀이었던 왓포드와 갈등을 빚고 있고 2018-19 시즌 초반 현재도 갈등이 진행중. 잡음이 있긴 했지만 어찌됐든 모시리 대주주는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그를 데려온 듯하며, 그도 모시리의 철학에 동의했다. 더불어 네덜란드 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풋볼 디렉터인 마르셀 브랜즈를 새로운 단장으로 영입했다.
그 다음 시즌인 2019-20 시즌, 마르코 실바는 졸전을 거듭한 끝에 강등권까지 추락했고, 리버풀과의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5:2라는 스코어로 패배한 끝에 경질되었다. 감독대행은 과거 팀의 간판 스트라이커였고 은퇴 후 코치로 계속 에버튼에 남아 있었던 던컨 퍼거슨.
이후 에버튼은 21일(한국시간),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 부임을 발표했다. 계약기간은 2023-24 시즌까지.
4. 스폰서 변천
4.1. 유니폼
- 엄브로 (1974~1983/1986~2000/2004~2009/2014~2020)
- 르꼬끄 스포르티브 (1983~1986/2009~2012)
- 푸마 (2000~2004)
- 나이키 (2012~2014)
- 험멜 (2020~)
4.2. 스폰서
- 하프니아 보험[11] (1980~1985)
- NEC (1985~1995)
- 단카[12] (1995~1997)
- one 2 one[13] (1997~2002)
- 케지안 그룹[14] (2002~2004)
- 타이베브(창 맥주) (2004~2017)
- 스포트페사[15] (2017~2020)
- 로비오 엔터테인먼트(앵그리버드)[16] (2017~2020)
- CAZOO[17] (2020~ )
5. 역대 시즌
5.1. 2008-09 & 2009-10 & 2010-11 시즌
5.2. 2011-12 시즌
5.3. 2012-13 시즌
5.4. 2013-14 시즌
5.5. 2014-15 시즌
5.6. 2015-16 시즌
5.7. 2016-17 시즌
5.8. 2017-18 시즌
5.9. 2018-19 시즌
5.10. 2019-20 시즌
5.11. 2020-21 시즌
6. 역대 감독
7. 리즈 시절
1888년 창립된 "더 풋볼 리그" (The Football League)의 공식 창설 멤버인 에버튼은 1890-91시즌 클럽 역사상 최초의 우승으로 리그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다.1906년에는 첫 FA컵 우승을 달성한 에버튼은 1914-15년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고, 한동안 축구 경기가 중단되면서 구단의 상승세도 한 풀 꺾이게 된다.)
한동안 잠잠하던 에버튼은 1925년 클럽 역사상 최고의 레전드로 평가받는 딕시 딘을 영입하면서, 새로운 전성기를 열었다. 1927-28시즌 39경기에서 무려 60골을 넣은 딘은 에버튼의 세번째 리그 우승의 일등 공신이 된다. 이 시즌에 작성한 딕시 딘의 득점 기록은 여전히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한 시즌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있다(메시도 이 기록은 깨지 못했다.)
1부 리그로 돌아온 직후인 1931-32시즌 (예상치도 못한 구단 내분이 발생하며 뜬금 없이 2부리그로 강등된 에버튼은 그 다음 시즌 부진을 만회하는 엄청난 호성적을 거두고 바로 1부 리그로 재승격한다.) 기세를 탄 에버튼은 리그 4번째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The Toffees는 그 다음 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두번째 FA컵 우승을 차지하고, 1936년에 토마스 H. 매킨토시가 사망한 뒤 시오 켈리 비서가 비공식적으로 팀을 지휘한 1938-39시즌에는 팀 역사상 다섯번째 리그 우승까지 차지한다. 그리고 20년 넘게 부진이 이어진다.
에버튼의 두번째 전성기는 해리 캐터릭 감독이 부임하는 1961년에 찾아왔다. 캐터릭 감독의 에버튼에서의 두번째 시즌인 1962-63시즌 에버튼은 25년여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하고, 1966년에는 FA컵을 우승한다. 1968년 다시 FA컵 우승에 도전했지만, 아쉽게 준우승에 그친 에버튼은 2년 후 리즈 유나이티드에 승점 9점을 앞서며 리그 우승을 거뒀다. 한편 이 기간, 에버튼은 잉글랜드 축구 팀 역사상 최초로 5년 연속 유럽 대항전에 출전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61-62시즌 ~ 1966-67시즌)
1980년대 에버튼 구단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는 1980/81 시즌 도중에 새로 부임하는 하워드 켄달 감독과 함께 찾아왔다. 에버튼은 1984년 FA컵에서 우승하고, 1984-85시즌 & 1986-87시즌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1985년 에버튼은 UEFA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달성하는데 이는 구단 역사상 유일한 유럽 대항전 우승 기록이다.
7.1. 에버튼 자이언츠
항목 참조.
8. 이모저모
8.1. 서포터
에버터니언(Evertonian) 혹은 토피(Toffees. 영국식 달고나)라고 주로 불린다. 리버풀 시와 잉글랜드는 물론, 전 세계에 광범위한 서포터층을 자랑하는 리버풀 FC에 상대적으로 밀리는 편이고 한국에선 더더욱 리버풀의 서포터 수에 비해 한참 밀리는 모습이다.[18] 오죽하면 아이러브사커의 한 에버튼 팬이 에버튼을 응원하다가 '''제발 한국인이면 맨유좀응원합시다'''란 소리를 들었겠는가. 그래도 과거 강호이자 명문구단으로 역사가 있기에 여기도 세계적으로 서포터층이 있는 편이다.
국내에서 제일 팬이 많은 사이트는 네이버 카페 http://cafe.naver.com/evertonthetoffees이며 에버튼 관련 다양한 소식들을 접할 수 있다. 네이버 카페는 현지 언론과 담당 기자들의 정보들을 정확하게 전달해준다. 또한 한국 최초 에버튼 공식 팬클럽이다. 다음에도 팬카페가 있는데 그곳도 좋은 정보와 재미있는 대문으로 상당히 유명하다. 다음 카페 http://cafe.daum.net/goodison에서는 에버튼에 관한 전문적인 정보들과 뉴스들을 볼 수 있다. 에버튼 뉴스나 정보 제공면에서 큰 차이는 없으나 다음 카페는 ITK 내부 소식망까지 다룬다.
2000년 초반에 축구인 서형욱이 에버튼을 방문했는데 구디슨 파크에서 경기를 관람하고 에버튼 서포터들과 이야기를 해보니 동아시아인이 오는 것은 반갑다고 맞이하더란다. 그리고 주로 아시아 쪽 축구 팬이 너무나도 리버풀만 알아준다며 에버튼에 와서 리버풀을 더 많이 찾는다고 속상하다고 할 정도이다. 그나마 에버튼에서 중국인 선수들이 뛸 때에는 중국인 서포터들이 늘어났지만 워크 퍼밋 및 여러 조건이 강화되면서 중국인들이 떠나자[19] 중국인 서포터들도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그래도 둘러보면 여기저기 서식하는 에버튼 서포터들이 조금씩 보인다. 유명인 에버튼 서포터로는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 실베스타 스탤론'''이 있으며 스탤론은 영국에 오면 여길 자주 들를 정도로 팬이라고 한다. 실제로 에버튼 구단 박물관에 가보면 에버튼 머플러를 들고 웃으며 사진을 찍은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최근, 에버튼의 서포터들이 재정위기에 처한 구단의 상황을 안타깝게 여겨서 폴 매카트니에게 애정을 갖고 구단을 인수해달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감당할 범위가 아니라고 말했다. 전 WWE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이자 WWE에 'YES!' 광풍을 일으킨 불세출의 테크니션 대니얼 브라이언도 에버튼 팬이다.
라이벌 팀의 양대 전설이 된 스티븐 제라드와 제이미 캐러거도 유년 시절 에버튼 서포터였다는 얘기가 있으며[20][21] 이와 같이 리버풀 FC에서 선수 생활을 한 에버튼 서포터로는 로비 파울러, 마이클 오웬 등이 있다. 캐러거의 경우 어린 시절부터 에버튼의 선수로 리버풀에게 골을 넣는 것이 소원이어서, 리버풀 대 에버튼의 자선 경기를 개최하여 에버튼이 얻은 페널티킥을 대신 차 넣으며(...) 어린 시절의 소원을 성취하기도.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에버튼 유스 출신인 웨인 루니의 경우 맨유에서 뛰면서 에버튼 팬들에게 유다 취급을 받으면서도 "한번 블루는 영원히 블루다"라고 떠들고 다니면서 갓난아기 아들도 에버튼 서포터로 등록시킨 진성 에버튼 서포터이다.
2016년 7월에 보스니아 사람 한 명이 영국 프로 축구 리그 4티어에 걸쳐 있는 모든 92개의 팀들에게 왜 자신이 이 팀의 서포터여야 되는가하고 묻는 이메일을 보냈고 이를 레딧에 인증했는데,[22] 이 중 에버튼에서는 답장과 함께 같은 보스니아인인 무하메드 베시치가 특별히 비디오 메시지를 제작해서 보내는 정성 끝에 그 사람이 에버튼을 응원하게 되었다는 훈훈한(?) 해프닝이 있었다.
8.2. 최초의 기록들
에버튼은 축구와 관련해서 다양한 최초의 기록들을 가지고 있다. 우선 에버튼의 홈 경기장 구디슨 파크는 세계 최초의 축구 전용 경기장이며, 여기서 최초의 FA 컵 결승전이 개최되었다. 경기장에 조명 스탠드와 스코어 보드, 선수단 대기 더그아웃을 가장 먼저 설치하며 축구 경기장의 현대화에도 기여했다. 위에 나온 대로 하층 노동자들이나 본다고 무시당하던 프로 축구에 처음으로 왕세자가 찾아온 것도 에버튼 경기이다.
1933년에는 최초로 선수들의 유니폼에 등번호를 넣었다. 1888년 풋볼 리그 창설, 1992년 프리미어 리그 창설 때 원년 멤버로 참가하였다. 또한 최초로 승부차기로 승패를 가르는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970년 유러피언 컵, vs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8.3. 운이 없는 클럽
괴이하게도, 에버튼은 우승을 거두고 상승세를 탈 즈음에 자신들의 책임이 없는 사건에 억울하게 휘말려 상승세가 꺾였다. 1914/15시즌에 1부 리그 우승을 달성한 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리그가 중단되었고, 1938/39시즌에 1부 우승컵을 탈환했으나 이번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또 리그가 중단되었으며, 클럽 역사상 최절정기였던 1980년대에는 UEFA가 헤이젤 참사의 책임을 물어 잉글랜드 클럽들의 유럽 대회 출전을 금지하면서 2번의 UEFA 챔피언스 리그(이 당시에는 유러피언 컵)와 1번의 UEFA 유로파 리그(이 당시에는 UEFA 컵)진출 기회를 놓쳤다. 그 외에 1968/69시즌을 3위로 마치며 이듬해 인터-시티 페어스컵 출전 자격을 획득했으나, 페어스컵 특유의 '''1도시 1구단 출전''' 악법 때문에 2위를 기록한 리버풀에게 밀려 출전권을 박탈당하는 등 실력에 비해 지독히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 15/16 리그 22라운드 첼시전에서 추가시간 막바지 98분에 자책골을 넣었던 존 테리의 골이 오심으로 밝혀지면서 승점 3점을 도둑맞게 된다.[23] 또한 오심에 대한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15/16리그컵 준결승전에서 맨시티 와의 경기중 오심골이 나오면서 패해 그야말로 안습... +로 상기 언급한대로 실력으로 진 것이라 변명이 가능하진 않지만 04-05시즌 빅4의 헤게모니를 무너뜨리고 챔피언스리그 출전 티켓을 따냈지만 32강 무대도 못밟아보고 예선탈락한 05-06시즌도 굉장히 아쉬운 순간이다. 이 때 본선만 밟았어도 이후 자금력 부족에 허덕였던 꼴은 안봤거나 그나마 늦게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안습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지경. 특히 헤이젤 참사로 인해서 유럽에서의 더 큰 성공이 가로막히게 되자 참사의 원인을 제공한 리버풀에 대한 에버튼 서포터들의 증오와 반감이 커지게 되었다.
8.4. 리그 컵과의 악연
잉글랜드에서 손꼽히는 명문인 에버튼이지만 풋볼 리그 컵(2016년부터는 카라바오 컵. 스폰서에 따라서 컵 이름이 계속 바뀐다)에선 우승 경력이 없다. 준우승 기록만 2번 있을 뿐이다(1977, 1984). 참고로 역대 리그 컵 우승팀들을 살펴보면 레스터 시티(우승 경력이 무려 3회!), 미들즈브러( 이동국이 한때 뛰었던 그 팀), 루턴 타운(현재 2부 리그 팀) 등등이 있다. 10-11 시즌 리그 컵에서는 3라운드에서 3부 리그 팀 브렌트포드와 맞붙어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졸전 끝에 패배, 자이언트 킬링의 희생양이 되며 좀처럼 풀릴 기미가 안보이는 악연을 지속하게 되었다. 이후 15/16시즌에 준결승전 까지 가며 오랜만에 우승에 도전했지만 그마저도 오심골이 나오면서 패하고 만다. 20/21시즌에는 8강전인 맨유전에서 에딘손 카바니가 예리 미나의 목을 조르는 행위가 있었지만 VAR이 8강전까지는 도입되지 않은 상황에서 심판이 보지를 못해 카바니의 퇴장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그 카바니에게 0-0 상황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패배의 빌미가 된 선제실점을 먹히고 말았다.
9. 회장에 대하여
빌 켄라이트는 건강 악화인 상황에서 2016년 2월 28일, 이란의 부호 파하드 모시리씨가 대주주가 되었다. 하지만 켄라이트 구단주의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켄라이트가 회장 직위는 유지한다.(켄라이트의 대리는 존 우즈)
2018년 모시리가 에버튼의 지분을 51%까지 늘렸고 켄라이트는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10. 엠블럼
2013-14시즌 잠시 바뀐 엠블럼은 팬들 사이에서 최악으로 꼽힌다. 오죽하면 고속도로 표지판 같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니...
11. 1군 스쿼드
12. 응원가
- 가사 -
13. 그 외
- 2000년대 들어 고질적인 재정난을 해소키 위해 수많은 노력을 벌였는데, EPL 팀들 중에서 먼저 아시아 시장 개척에 열을 올린 것이다. 2002/03 시즌부터 중국 이동통신사 케지안과 스폰서를 맺으며 중국 국가대표 출신 리톄를 영입하는가 하면, 중국어 홈페이지를 열고 중국까지 가서 축구교실을 열기도 했다. 2004/05 시즌부터 탁신의 리버풀 인수 움직임에 편승해 태국 맥주회사 타이베브와 손을 잡으며 태국 유소년 선수 3명을 유스팀에 입단시켰다. 심지어 구장 매점에 창 맥주도 들여놨으나, 팬들의 반발 탓에 타이베브 측에 양해를 구해 타사 맥주들도 같이 팔았다.
- 2012년 8월 8일(현지시간), AEK 아테네와의 친선 경기에서는 한 수비수가 골을 넣자 열광한 팬들이 피치로 난입해 선수들과 같이 골을 축하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골의 주인공은 토니 히버트. 10살 때부터 에버튼 유스에서 축구를 시작한 그는 2001년 데뷔 이후 12시즌 동안 에버튼 유니폼만을 입으며 주전 수비수로 활약했던 '원 클럽 맨'이다. 308경기를 출장해온 그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그 동안 골을 못 넣었다는 점. 서포터들도 "히버트가 골을 넣으면 우리는 폭동을 일으킬거야" (When Hibbo scores, We Riot)"라는 응원가를 부르며 그의 골을 학수고대해 왔는데... 드디어 이날 경기에서 골을 넣은 것이다. 그것도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치러진 친선 경기에서. 기쁠 만하다. 덧붙이자면 15/16시즌에도 재계약을 했다고 한다.
- 조아라의 연재소설 나는 귀족이다의 주인공 유지웅이 인수한 구단이 바로 이 에버튼 FC이다. 작중에서는 레드몹 레이드로 2개월간 벌어들인 22억 파운드 가지고 구단 인수는 물론 메시, 팔카오, 카바니, 아자르, 함식, 디 마리아, 카바예, 보누치, 쿠르트와 등등의 초호화 선수들을 대거 영입해서 리그 우승을 노렸다. 작가의 말로는 '모예스 움짤'에 필을 받아서 이 에버튼을 선택했다고.
- 이상하리만치 최근 몇 년 들어 선수들의 골절상이 잦은 구단이다. 2014년의 브라이언 오비에도를 시작으로 2017년 셰이머스 콜먼, 2018년 제임스 맥카시, 그리고 2019년 안드레 고메스까지 매우 심각한[24] 부상을 당한 전력이 있다.
14. 둘러보기
[1] 국립국어원 표기 용례에 따라 ''''에버턴''''으로 표기한다.[2] /ˈɛvərtən/[3] 세인트 도밍고스 F.C.로 창단.[4] 에버튼 마이너 갤러리 참조.[5] 단 4시즌만 2부 리그 활동.[6] 각국의 컵대회 우승팀이 나가던 유럽 대항전.[7] 연속 참가 기록은 1부 리그에서 97시즌째 버티고 있는 아스날에게 뒤지지만, 1부 리그에서 보낸 시즌은 리그 최다.[8] EPL 빅4 체제 하에서 2009-10 시즌 토트넘 핫스퍼가 리그 4위로 진출하여 챔피언스 리그 8강까지 간 것에 견주는 경우도 있다.[9] 홈에선 맨체스터 시티를 4-0으로 대파하는 명경기를 선보인 바 있다.[10] 마지막 골을 먹힌 뒤 모시리와 켄라이트의 참담한 표정이 잡혔다. #[11] 덴마크의 보험업체. 1993년 파산.[12] 미국의 사무기기 업체.[13] 2002년에 T모바일로 합병.[14] 중국의 이동통신 업체. 2013년에 파산.[15] 아프리카를 기반으로 하는 사설베팅사이트.[16] 슬리브 스폰서.[17] 영국의 중고차 업체.[18] 에버튼의 유니폼 스폰서가 바로 태국 맥주 회사인 창(Chang)이다. 에버튼 서포터들은 창이 스폰서가 되자 '뭐냐 그런 업체도 있냐?'라는 반응이었고 반대로 태국에서는 '에버튼은 뭥미?'라는 반응이었다. 태국에선 리버풀이 워낙 인기가 많아 에버튼은 가려졌고, 전 태국 총리이자 맨시티 구단주였던 탁신 치나왓은 리버풀을 소유하면 태국 내 입지가 강화된다고 계산하여 리버풀을 사려고 했을 정도이다. 참고로 창은 에버튼 경기장에선 창 맥주만 판매하라는 방침을 내세웠다가 에버튼 서포터들이 반발하여 없던 일로 했다. 구디슨 파크 매점에서 창 맥주를 팔긴 하지만 당연히 인기는 진짜 없다.[19] 프리미어 리그가 피파 랭킹 70위 내 나라들 선수들로 영입 조건을 강화하면서 중국인 선수들은 들어올 수 없게 되었다.[20] 사실 제라드가 원래 에버튼 서포터는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열렬한 리버풀 서포터였고, 제라드의 삼촌이 에버튼 서포터였다고 한다. 그래서 둘은 항상 제라드를 각자 자기들이 응원하는 팀의 서포터로 만들려고 했다고... 제라드의 어린 시절 에버튼 유니폼을 입고 찍은 사진이 있어서 그가 에버튼 서포터였다고 설명이 돼 있는 거 같지만 그건 그의 삼촌이 제라드의 아버지 몰래 에버튼 경기에 데리고 가면서 찍었다고 한다. 이 삼촌의 아들이자 스티브의 사촌동생인 앤서니 제라드(허더스필드 타운 소속, 중앙 수비수)는 실제 에버튼 유스로 축구 인생을 시작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제라드는 어느 한 팀이 중요한 게 아니고 축구 자체가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한테 토트넘, 맨유(!)같은 여타 팀의 유니폼을 사 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어느 팀이든지 축구 경기를 보러 가는 게 즐거웠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현재에 와서는 삼촌을 따라 에버튼 경기장에 간 것이나, 에버튼 유니폼을 입고 사진을 찍은 것이 조금은 부끄러운 과거라고 선수 본인이 자서전에 기고한 바 있다.[21] 제이미 캐러거는 진짜 어릴 때는 에버튼 서포터가 맞다. 그래서 포포투 인터뷰때 처음 프로 데뷔했을 때는 리버풀과 에버튼이 둘 다 잘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어느날 중요한 경기에서 패하고 울적한 기분으로 펍에 갔더니 에버튼 서포터들이 리버풀을 조롱하는 것에 빡쳐서 팬심을 버렸다고 인터뷰한 적이 있다. 지금은 에버튼이 무조건 졌으면 좋겠다고.[22] 이 중 실제로 답장한 곳은 10팀 정도였고 상당수가 복붙 메시지였다고 한다.[23] 오죽했으면 이 경기가 끝난 후 거스 히딩크 감독도 존 테리의 골이 오심이라고 인정했으니 말 다했다.[24] 부상기간이 각각 오비에도 7개월, 콜먼 10개월, 맥카시 1년이었다. 고메스는 3~5개월로 예상되었으니 다행히 2개월 여만에 피치에 복귀했다.